[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오순명 금감원 소비자보호처장의 '아버지의 훈시'
무일푼 피란민이었던 아버지 "여자라고 못 하는 일 없을 것"
아버지 말씀 신앙처럼 지키며 지점장·본부장 시절 실적 1위
부행장 승진에서 탈락했을 때
"넌 지금까지 잘해 온 거야" 아버지의 말씀 위안 삼아
"순명아~ 문 열어라."
초인종이 드물었던 시절,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실 때면 항상 내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셨다. 아들이 없는 집의 네 자매 중 장녀이셨던 어머니는 두 딸을 낳고서 어렵게 얻은 외동아들 이름을 아버지가 불러주시기를 바라셨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범생이었던 언니 이름도 아니고, 모험심은 많은 개구쟁이 둘째 딸인 나의 이름을 항상 먼저 부르셨다.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이름난 수재(秀才)이셨던 아버지는 해주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재직하셨다. 하지만 일제의 앞잡이 노릇 하기가 싫어 공업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기계를 만드는 기술자가 되셨다. 한국전쟁 직전 피란하셨던 아버지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산업이었던 골판지 포장 기계를 제작하는 데 이름을 날리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의 무일푼으로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이었던 까닭에 네 남매를 포함한 여섯 식구의 운명은 아버지 사업의 부침(浮沈)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그 시절을 견딘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바글거리며 살고, 끼니를 걱정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아버지는 네 남매를 보석처럼 아끼셨다. 한 번도 우리 남매에게 매를 드신 적도 큰 소리로 꾸짖는 일도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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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순명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은“내가 세운 인생 목표가 주변 사람들에겐 비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지만, 그럴 때마다‘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격려한 아버지 말씀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좋아하시던 술을 드신 날이면 군것질거리로 사과를 봉지에 담아 오셔서는 자고 있는 우리를 깨워서 일장 연설을 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피란 온 이유, 통일의 필요성, 배움의 중요성, 아버지의 못 이룬 꿈, 우리 장래에 대한 얘기를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야 했다. 아버지 연설을 들을 때면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아랫목에서 자고 있는 막내가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아버지 연설의 마무리는 늘 같았다. "그래 순명아. 앞으로는 우리나라도 여자라서 못 하는 일은 없는 그런 때가 올 것이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만 해라. 이 아비가 끼니를 거르는 한이 있어도 네가 원하는 만큼 공부는 시켜 줄 것이다."
취중(醉中)에 하신 말이었지만, 아버지 인생에 대한 자조와 한탄이 뒤섞인 훈시를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의 훈시는 대학 졸업 때까지 이어졌고, 실제로 아버지는 그 말씀을 신앙처럼 지키셨다.
거래처의 부도로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서울 영등포 철공소가 연쇄 부도를 맞았을 때도, 우리 남매의 등록금은 목숨을 걸고 마련해 오셨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훈시가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고, 인생의 고비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됐다. 나는 중학교, 대학교 입시에서도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때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여직원은 고객의 예금이나 수납하던 시절, 30년 넘는 나의 은행원 생활은 그다지 순탄치는 않았다. 은행원이 된 직후 내 꿈 역시 그리 원대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1978년 상업은행에 입행한 직후 인사부 직원이 "순명씨는 언제까지 은행에 다닐 계획이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55세 정년까지"였다. 정년 채우는 것이 입행 당시의 꿈이었던 셈이다. 이 꿈도 당시로선 '당찬' 축에 들었다. 그때만 해도 여자 행원은 결혼과 동시에 사표를 내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었기 때문이다.
입행 후 3~4년이 지난 뒤 내 꿈은 지점장이 되는 것이었다. 별것 아니었던 나의 목표는 주변 사람들에겐 비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너는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아버지의 훈시는 내 인생의 밑천이요 힘이 됐지만, 때로는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여신·외환 업무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서 여직원에게는 절대 맡길 수 없다는 상사에게 맞서 "나도 할 수 있다"고 싸움을 벌여야 했다.
외환 책임자로 근무하던 시절, 신규 거래처에서 외화 수표를 부도내고 필리핀으로 야반도주를 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 돈으로 3000만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여직원이 별수 있겠느냐"는 비아냥이 듣기 싫어 어떻게 해서든 돈을 회수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고심 끝에 도주한 업체 사장의 어머니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댁의 아드님 사정도 딱하지만, 고객들이 맡긴 은행 돈을 몽땅 떼먹어 버리면 저는 어떻게 하느냐"며 매달렸다. 결국 그 어머니는 대출을 받아 떼인 돈의 3분의 1 정도를 납부해 줬다.
외환 위기 시절 여직원들이 무더기로 명퇴 압박을 받고 있을 때도 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며 버텼다. 하지만 30년 은행원 생활은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지점장·본부장으로서 전국 1등 실적을 거두고 내심 "실력으로만 하면 부행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결과는 승진 탈락이었다. 여자여서 부행장 승진에서 탈락한 것이라고 주변에서 위로했지만, 그런 것을 변명거리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부행장 승진에서 탈락하고 은행을 떠나는 순간 나는 "순명아. 너는 지금까지 잘해 온 거야"라며 아버지의 말을 위안 삼아 짐을 쌌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자식에게 나눠주는 교훈과 사랑은 끝이 없겠지만, 내 인생에 아버지의 말씀은 유독 강렬하게 남아 있다. 요즘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가끔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가 있다.
"그래요. 아버지, 여자라서 못하는 일이 있나요. 저는 잘할 수 있어요.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무수리 정신으로 살고 있답니다. 아버지, 저 잘 살고 있는 거 맞지요?"
['금융권 왕언니' 오순명 처장은]오순명(59) 처장은 33년간 시중은행에서 근무한 은행원 출신이다. 한국외국어대 이태리어과를 졸업한 뒤 1978년 상업은행에 대졸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우리은행 연희동지점장, 인천영업본부장 시절 영업 실적 전국 1위를 달성해 여성 부행장 탄생을 예고했지만 결국 승진에서 탈락했다. 2011년 은행에서 퇴직하고 우리은행 자회사 ‘우리모기지’ 사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5월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에 발탁됐다. 금감원의 유일한 여성 임원이다.